100년 갈등의 진실
이란 vs 영국, 그리고 미국
1901년, 60년의 운명을 판 계약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이란은 페르시아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카자르 왕조(1789~1925년)가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왕조는 이미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19세기 내내 이란은 북쪽의 러시아 제국과 남쪽의 영국 제국 사이에서 끊임없는 압박을 받았고, 두 차례의 러시아-페르시아 전쟁(1804~1813년, 1826~1828년)에서 패배하며 영토의 상당 부분을 러시아에 빼앗겼습니다. 카자르 왕조의 군주들은 외세의 압력에 맞서기보다는 자신들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나라의 자원과 이권을 하나씩 팔아넘기고 있었습니다.
본 글의 모든 이미지는 역사적 사실과 정책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 제작된 교육용 그래픽입니다. 실제 사진이 아닌 개념 설명용 이미지임을 알려드립니다.
1901년 5월 28일, 역사적인 계약이 체결됩니다. 카자르 왕조의 모자파르 앗딘 샤(Mozzafar al-Din Shah)는 영국인 사업가 윌리엄 녹스 다아시(William Knox D’Arcy)에게 이란 전역에서 석유를 탐사하고 채굴할 수 있는 권리를 60년 동안 넘겨주었습니다. 다아시가 지불한 금액은 겨우 2만 파운드(현재 가치로 약 300만 달러)였고, 추가로 회사 주식의 16퍼센트와 석유 판매 수익의 16퍼센트를 이란 정부에 지급하기로 했습니다. 샤는 이 돈으로 유럽 여행 경비를 충당하고 궁전을 치장했습니다. 이란 국민들은 이 계약의 존재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다아시는 호주 금광 사업으로 재산을 모은 사업가였지만, 석유 탐사에는 경험이 없었습니다. 그는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 이란 남서부 지역에서 시추 작업을 시작했지만, 몇 년이 지나도 석유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아시의 재산은 바닥나기 시작했고, 1905년 그는 버마 석유 회사(Burmah Oil Company)에 지분을 팔고 공동 투자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성과는 없었고, 1908년 초 버마 석유는 이란 프로젝트를 포기하려 했습니다. 시추 작업을 중단하라는 전보가 현장으로 발송되었습니다.
1908년 5월 26일, 운명을 바꾼 발견
전보가 도착하기 불과 며칠 전인 1908년 5월 26일 새벽 4시, 이란 남서부 마스제드 솔레이만(Masjed Soleyman) 지역의 시추 현장에서 거대한 석유 분출이 일어났습니다. 땅속에서 검은 액체가 폭발적으로 솟구쳐 올라왔고, 현장 기술자들은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중동에서 처음으로 상업적 규모의 유전이 발견된 순간이었습니다. 이 발견은 세계사를 바꾸게 됩니다.
1909년 4월 14일, 다아시와 버마 석유는 앵글로-페르시안 석유 회사(Anglo-Persian Oil Company, APOC)를 설립했습니다. 이 회사는 나중에 앵글로-이란 석유 회사(Anglo-Iranian Oil Company, AIOC)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1954년 현재 우리가 아는 BP(British Petroleum)가 됩니다. 처음에는 자금 부족과 기술적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1912년 영국 해군이 게임 체인저가 됩니다.
당시 영국 해군 제1 해군장관이었던 윈스턴 처칠은 전함의 연료를 석탄에서 석유로 전환하는 대대적인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석유는 석탄보다 에너지 밀도가 높고, 연료 보급이 빠르며, 배의 속도를 높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영국이 석유를 생산하지 못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처칠은 이란의 석유가 해답이라고 판단했고, 1914년 영국 정부는 200만 파운드를 투자해 앵글로-페르시안 석유 회사의 지분 51퍼센트를 인수했습니다. 이로써 이 회사는 사실상 영국 국영 기업이 되었고, 이란의 석유는 영국 제국의 전략 자산이 되었습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영국 해군은 이란 석유를 연료로 독일 해군을 격파했습니다. 전쟁 내내 앵글로-페르시안은 막대한 이익을 올렸지만, 이란이 받는 몫은 턱없이 적었습니다. 회사는 회계 장부를 조작해 수익을 축소 보고했고, 이란 정부는 제대로 된 감사 권한도 없었습니다. 1920년대에 이르러 앵글로-페르시안은 세계에서 가장 수익성 높은 석유 회사 중 하나가 되었지만, 이란은 자국 땅에서 나오는 석유로 인한 이익의 극히 일부만 받았습니다.
카자르 왕조의 몰락과 레자 샤의 등장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이란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카자르 왕조는 무능과 부패로 국민의 신뢰를 완전히 잃었고, 나라는 사실상 영국과 러시아의 영향권 아래 분할되어 있었습니다. 1919년 영국은 이란과 협정을 체결해 이란을 사실상 보호국으로 만들려 했지만, 이란 국민과 의회의 거센 반발로 무산되었습니다. 이 시기 이란인들 사이에서는 강력한 반영 정서와 민족주의가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1921년 2월 21일, 페르시아 코사크 여단의 지휘관이었던 레자 칸(Reza Khan)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테헤란을 장악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전쟁부 장관이 되었다가 1923년 총리가 되었고, 1925년 10월 의회는 카자르 왕조를 폐위하고 레자 칸을 새 국왕으로 선출했습니다. 그는 레자 샤 팔레비(Reza Shah Pahlavi)라는 이름으로 즉위하며 팔레비 왕조(1925~1979년)를 열었습니다. 역사가들은 레자 칸의 쿠데타 배후에 영국의 지원이 있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영국은 혼란한 이란을 안정시킬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했고, 레자 칸이 그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레자 샤는 야심찬 근대화 프로그램을 추진했습니다. 그는 터키의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를 모델로 삼아 세속주의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전통적인 이슬람 법원을 폐지하고 서구식 법체계를 도입했으며, 여성들에게 히잡 착용을 금지하는 강경한 조치를 취했습니다. 철도를 건설하고 공장을 세웠으며, 교육 제도를 현대화했습니다. 1935년에는 국가 명칭을 페르시아에서 이란으로 공식 변경했습니다. 이란은 아리아인의 땅이라는 뜻으로, 민족주의적 자긍심을 드러내는 이름이었습니다.
하지만 레자 샤의 가장 큰 과제는 영국의 석유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1920년대 후반부터 그는 앵글로-페르시안 석유 회사와의 계약 조건을 재협상하려 시도했습니다. 이란이 받는 로열티가 너무 적다는 것이 핵심 불만이었습니다. 회사는 이란에 연간 약 100만 파운드를 지불했지만, 같은 기간 회사가 올린 순이익은 수백만 파운드에 달했습니다. 게다가 회사는 이란인 노동자들을 열악한 환경에서 낮은 임금으로 고용했고, 고위 관리직은 모두 영국인이 차지했습니다. 석유 시설이 있는 아바단(Abadan) 지역은 마치 식민지와 같았습니다. 영국인들은 에어컨과 수영장이 있는 고급 주택에서 살았지만, 이란인 노동자들은 판잣집에서 지냈습니다.
1932년 11월, 레자 샤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는 1901년 다아시 계약을 일방적으로 취소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영국은 격분했고, 이 문제를 국제연맹에 제소했습니다. 영국 해군은 페르시아만에 군함을 보내 무력 시위를 벌였습니다. 결국 국제적 압력과 군사적 위협 앞에서 레자 샤는 한 발 물러서야 했습니다. 1933년 4월, 새로운 계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석유 채굴권은 60년에서 다시 60년으로 연장되어 1993년까지 보장되었고, 이란이 받는 로열티는 약간 인상되었지만 여전히 불공평한 수준이었습니다. 레자 샤의 도전은 실패로 끝났지만, 이란 국민들 사이에서는 석유가 자신들의 것이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과 레자 샤의 퇴위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이란은 중립을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레자 샤는 독일과의 경제 관계를 유지했고, 독일 기술자들이 이란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영국과 소련의 눈에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란은 지리적으로 페르시아만과 카스피해를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였고, 소련에 군수 물자를 공급하는 연합군의 보급로로 중요했습니다. 1941년 6월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직후, 영국과 소련은 이란에 독일 국민들을 추방하고 연합군의 보급로를 제공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레자 샤가 거부하자, 1941년 8월 25일 영국군과 소련군이 동시에 이란을 침공했습니다.
이란군은 거의 저항하지 못했고, 며칠 만에 수도 테헤란이 점령되었습니다. 영국과 소련은 레자 샤에게 퇴위를 강요했고, 1941년 9월 16일 그는 왕위를 아들 모하마드 레자 팔레비(Mohammad Reza Pahlavi)에게 물려주고 남아프리카로 망명을 떠났습니다. 그는 1944년 요하네스버그에서 사망했습니다. 22세의 젊은 모하마드 레자 샤가 왕위에 올랐지만, 실제 권력은 영국과 소련 점령군의 손에 있었습니다. 이란은 북쪽은 소련이, 남쪽은 영국이 나눠 지배하는 사실상의 분할 점령 상태가 되었습니다.
전쟁 기간 동안 이란의 석유는 연합군의 전쟁 기계를 움직이는 핵심 자원이었습니다. 앵글로-이란 석유 회사는 막대한 이익을 올렸지만, 이란 경제는 파탄 지경이었습니다. 외국 군대의 주둔으로 인플레이션이 치솟았고, 식량 부족으로 기근이 발생했습니다. 이란 국민들의 분노는 커져갔고, 특히 영국에 대한 적대감이 깊어졌습니다. 사람들은 레자 샤를 몰아낸 것도 영국이고, 자신들의 석유를 빼앗아 가는 것도 영국이며, 젊은 샤를 꼭두각시로 조종하는 것도 영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전후 혼란과 민족주의의 부상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소련군은 철수하지 않고 이란 북부에 남아 있었습니다. 소련은 이란 북서부 아제르바이잔과 쿠르디스탄 지역에서 친소 정권을 수립하려 했고, 이란 정부에 석유 채굴권을 요구했습니다. 미국의 압력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개입으로 소련군은 1946년 5월 마침내 철수했지만, 이란인들에게는 외세가 자신들의 나라를 마음대로 주무른다는 굴욕감이 뿌리 깊게 남았습니다.
전후 이란 정치는 활기를 띠기 시작했습니다. 1906년 입헌 혁명 이후 이란에는 의회인 마즐리스(Majlis)가 있었고, 다양한 정당과 정치 세력이 등장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 모하마드 모사데크였습니다. 그는 카자르 왕조 시절 재무부 장관을 지낸 귀족 출신으로, 프랑스와 스위스에서 법학과 정치학을 공부한 지식인이었습니다. 1920년대에는 레자 샤의 독재에 반대하다가 가택 연금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그는 정계에 복귀해 의회에서 활동하며 반영, 반제국주의, 석유 국유화를 주장했습니다.
1949년 모사데크는 국민전선(National Front)이라는 정치 연합을 결성했습니다. 이 연합에는 세속주의 지식인, 종교 지도자, 상인 길드, 노동조합 등 다양한 세력이 참여했고, 공통의 목표는 하나였습니다. 이란의 석유를 이란인의 손으로 되찾자는 것이었습니다. 국민전선의 구호는 간단하고 강력했습니다. 석유 국유화, 외세 간섭 배격, 민주주의 확립. 이 메시지는 수십 년간 외세의 착취를 당해온 이란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1949년 7월, 앵글로-이란 석유 회사와의 계약 재협상이 시작되었지만, 협상은 난항을 겪었습니다. 회사 측은 로열티를 약간 인상하겠다고 제안했지만, 이란 측은 최소한 수익의 50퍼센트를 요구했습니다. 참고로 같은 시기 사우디아라비아는 미국 석유 회사들과 50대 50 수익 분배 계약을 맺은 상태였습니다. 이란인들은 왜 자신들만 이렇게 불공정한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의회와 거리에서는 국유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졌고, 1950년 가을에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파업과 폭동이 일어났고, 석유 시설 노동자들이 앵글로-이란 석유 회사에 맞서 파업을 벌였습니다.
1951년 3월 7일, 친영 성향의 알리 라즈마라(Ali Razmara) 총리가 암살되었습니다. 그는 의회에서 석유 국유화는 불가능하다고 증언한 직후 이슬람 과격파에게 총격을 당해 사망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이란 정치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의회는 석유 국유화법을 통과시켰고, 1951년 4월 29일 모하마드 모사데크가 새 총리로 선출되었습니다. 5월 1일, 샤는 석유 국유화법에 서명했습니다. 이란 전역에서 축하 행사가 벌어졌고, 사람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환호했습니다.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50년 동안 영국의 손에 있던 이란의 석유가 마침내 이란인의 것이 될 터였습니다.
하지만 영국은 이 결정을 받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이란 석유는 단순한 사업이 아니라 제국의 생명줄이었고, 만약 이란이 성공한다면 다른 중동 국가들도 따라 할 것이 분명했습니다. 영국 정부와 앵글로-이란 석유 회사는 모사데크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 계획의 이름은 아작스 작전(Operation Ajax)이었고, 미국 CIA의 협력을 얻어 1953년 8월 실행에 옮겨졌습니다. 모사데크 정부가 세워지고 겨우 2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아작스 작전
1953년 8월, CIA와 영국 MI6가 공모하여 이란의 민주적으로 선출된 모사데크 총리를 쿠데타로 축출한 비밀 공작입니다. 석유 국유화에 반발한 영국과, 이란이 공산화될 것을 우려한 미국이 이란 군부와 왕당파에 자금을 제공하고 거리 폭동을 조직해 정권을 전복시켰습니다. 쿠데타 성공 후 친미 독재자 팔레비 샤가 복귀했고, 이란 석유는 다시 서방 석유 회사들의 손에 넘어갔으며, 이 사건은 1979년 혁명까지 이어지는 반미 감정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1953년, 민주주의를 파괴한 쿠데타
1951년 봄, 이란 의회는 역사적인 결정을 내렸습니다. 민주적 선거로 선출된 모하마드 모사데크 총리가 이끄는 정부는 영국과 이란의 합작 석유 회사인 앵글로-이란 석유 회사(현재 BP의 전신)를 국유화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란 땅에서 나오는 석유인데, 왜 영국이 이익의 대부분을 가져가야 하느냐는 것이 이란 국민들의 외침이었습니다. 모사데크는 영국과의 협상을 시도했지만, 영국은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경제 봉쇄로 맞섰습니다.
여기서 미국이 개입합니다. 1953년 8월,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영국 비밀정보부(MI6)는 아작스 작전(Operation Ajax, 영국명 Operation Boot)을 실시했습니다. 이 작전을 지휘한 사람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손자인 커밋 루스벨트 주니어(Kermit Roosevelt Jr.)였습니다. CIA는 이란 내 왕당파 군부와 보수 세력에 자금을 제공하고, 거리에서 폭동을 조직했으며, 모사데크 정부가 공산주의자들과 연합한다는 선전을 퍼뜨렸습니다. 8월 19일, 군부 쿠데타가 성공하면서 모사데크는 체포되었고, 가택 연금 상태에서 1967년 사망할 때까지 자유를 되찾지 못했습니다.
쿠데타 이후 복귀한 모하마드 레자 팔레비 샤(왕)는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독재 체제를 구축했습니다. 비밀경찰 사바크(SAVAK)는 반대파를 잔인하게 탄압했고, 이란은 중동의 미국 전초기지가 되었습니다. 미국은 이란에 F-14 전투기, 탱크, 첨단 무기를 팔았고, 이란은 미국에 석유를 공급했습니다. 하지만 이란 국민들의 마음속에는 1953년의 기억이 깊이 각인되어 있었습니다. 선거로 선출된 정부를 미국이 무너뜨렸다는 사실, 그리고 그 이유가 석유 이권 때문이었다는 사실 말입니다.
1979년, 혁명과 인질 사건
1979년 2월 11일, 이란 국민들은 드디어 팔레비 샤를 몰아내고 이슬람 공화국을 수립했습니다. 망명 중이던 시아파 최고 지도자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귀국하여 최고 지도자가 되었고, 혁명의 구호는 명확했습니다. “샤에게 죽음을, 미국에게 죽음을.” 호메이니는 미국을 큰 사탄(The Great Satan), 이스라엘을 작은 사탄(The Little Satan)이라고 불렀습니다. 1979년 10월, 암 치료를 이유로 미국이 팔레비 샤의 입국을 허용했다는 소식이 이란에 전해졌습니다.
이란 국민들은 격분했습니다. 1953년 쿠데타의 기억이 되살아났고, 미국이 다시 샤를 복귀시키려는 음모를 꾸민다는 의심이 퍼졌습니다. 11월 4일, 테헤란 대학교 학생들로 구성된 무슬림 학생 추종자(Muslim Student Followers of the Imam’s Line)라는 단체가 테헤란 주재 미국 대사관을 점거했습니다. 그들은 대사관 안에 있던 미국 외교관과 직원 66명을 인질로 잡았고(이 중 14명은 곧 석방), 나머지 52명은 444일 동안 억류되었습니다.
학생들은 대사관을 점거하면서 CIA 문서들을 발견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실제로 그들이 공개한 문서 중 일부는 미국 대사관이 이란 내 정보 수집 활동을 하고 있었고, 반혁명 세력과 접촉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란 정부는 이를 근거로 미국 대사관이 스파이 본부였다고 주장했습니다. 학생들의 요구는 명확했습니다. 팔레비 샤를 이란으로 송환하여 재판에 회부하고, 미국이 과거 쿠데타에 대해 사과하며, 샤가 이란에서 빼돌린 재산을 반환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은 충격에 빠졌습니다. 지미 카터 대통령은 외교적 압력과 경제 제재로 인질을 구출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1980년 4월 24일 사막 원(Operation Eagle Claw)이라는 군사 작전을 시도했으나 헬기 고장과 악천후로 8명의 미군이 사망하는 참사로 끝났습니다. 결국 인질들은 1981년 1월 20일,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바로 그 순간 석방되었습니다. 알제리의 중재로 이루어진 협상에서 미국은 이란의 동결 자산 80억 달러를 풀어주는 조건으로 인질을 돌려받았습니다.
444일간의 인질 사건은 미국 국민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남겼고, 카터 대통령은 재선에 실패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사건으로 미국과 이란의 외교 관계가 1980년 4월 7일 완전히 단절되었고, 그 이후 45년이 넘도록 두 나라는 국교를 회복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이란의 논리
미국은 믿을 수 없다
이란이 미국 대사관을 CIA 스파이 본부라고 본 데에는 역사적 근거가 있었습니다. 1953년 쿠데타가 바로 미국 대사관과 CIA 테헤란 지부에서 계획되고 실행되었기 때문입니다. 커밋 루스벨트는 대사관을 거점으로 이란 군부와 접촉했고, 쿠데타 자금을 배포했으며, 언론 조작 공작을 펼쳤습니다. 이란인들에게 미국 대사관은 단순한 외교 공관이 아니라, 자국 정부를 전복시킬 수 있는 음모의 중심지였던 것입니다.
1979년 혁명 직후, 미국은 공개적으로는 새 정부를 인정하는 듯했지만, 이란 혁명 정부는 미국이 또다시 반혁명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실제로 팔레비 샤의 측근들과 이란군 고위 장교들이 미국으로 망명했고, 미국 내에서 반혁명 활동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샤가 미국에 입국했다는 소식은 이란인들에게 1953년의 악몽이 재현될 것이라는 공포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당시 팔레비 샤는 사실 암 말기 상태였고 1980년 7월 이집트에서 사망했지만, 이란 정부는 그것이 미국의 위장 전술이라고 의심했습니다.
인질로 잡힌 미국 외교관들을 신문하는 과정에서, 이란 학생들은 대사관 내부에서 CIA 작전과 관련된 문서들을 발견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문서들은 이후 “미국 스파이 소굴의 문서(Documents from the US Espionage Den)”라는 제목으로 70여 권에 걸쳐 출판되었습니다. 여기에는 대사관 직원들이 이란 내 정치인, 성직자, 학생 단체들과 접촉한 내용, 이란 정부 내부 정보를 수집한 보고서, 반혁명 가능성을 분석한 문건 등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미국은 이 문서들이 조작되었거나 정상적인 외교 활동의 일부라고 반박했지만, 이란인들에게는 미국이 다시 한 번 자신들의 정부를 전복하려 했다는 명백한 증거였습니다.
이란-이라크 전쟁: 미국의 또 다른 배신
1980년 9월 22일,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이란을 침공하면서 8년간의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란은 혁명 직후의 혼란 속에서 군대가 약화된 상태였고, 국제적으로 고립되어 있었습니다. 미국과 서방 국가들,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아랍 국가들은 이라크를 지원했습니다. 미국은 후세인 정권에 군사 정보를 제공했고, 프랑스는 미라주 전투기를 팔았으며, 소련까지도 이라크에 무기를 공급했습니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화학무기 사용이었습니다. 1983년부터 이라크는 이란군과 이란 민간인을 상대로 머스터드 가스, 사린 가스, 타분 가스 등을 사용했습니다. 1988년 할라브자 학살에서는 쿠르드족 마을에 화학무기를 투하해 5천여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습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화학무기 사용을 비난하는 결의안을 채택했지만, 이라크를 직접 비난하는 것은 거부했고, 미국은 이라크에 대한 제재를 막았습니다.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양측 합쳐 약 백만 명이 사망했고, 이란에서만 5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란인들은 미국이 후세인을 시켜 자신들을 공격했다고 믿었습니다. 실제로 미국은 1980년대 내내 이라크에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제공했고, 레이건 행정부의 도널드 럼스펠드 특사는 1983년과 1984년 바그다드를 방문해 후세인과 악수를 나눴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2003년 미국은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후세인이 화학무기를 사용했다는 것을 전쟁 명분 중 하나로 내세웠지만, 1980년대에는 같은 화학무기 사용을 묵인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변수
이란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항상 적대적이지는 않았습니다. 팔레비 샤 시절 이란과 이스라엘은 사실상 동맹 관계였습니다. 이란은 이스라엘에 석유를 공급했고, 이스라엘은 이란에 군사 기술과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하지만 1979년 혁명 이후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호메이니는 이스라엘을 점령자 정권(Zionist regime)이라고 부르며, 팔레스타인 해방을 이슬람 세계의 의무로 선언했습니다.
이란은 레바논의 헤즈볼라, 팔레스타인의 하마스와 이슬람 지하드, 예멘의 후티 반군에 무기, 자금, 훈련을 제공했습니다. 이들 조직은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이란의 대리 세력이 되었습니다. 2006년 레바논 전쟁에서 헤즈볼라는 이란제 대전차 미사일과 로켓으로 이스라엘군을 괴롭혔고, 2023년 하마스의 이스라엘 기습 공격 배후에도 이란의 지원이 있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란을 실존적 위협으로 간주합니다. 특히 이란의 핵개발 프로그램은 이스라엘에게 악몽과 같습니다. 이란이 핵무기를 보유하면 중동의 군사 균형이 무너지고, 이스라엘의 생존이 위협받는다는 것이 이스라엘 정부의 판단입니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은 이란 핵시설에 대한 선제 공격을 여러 차례 검토했고, 실제로 사이버 공격과 암살 작전을 실행했습니다.
2010년, 이스라엘과 미국이 공동 개발한 것으로 알려진 스턱스넷(Stuxnet) 바이러스가 이란 나탄즈 핵시설의 원심분리기 약 천 대를 파괴했습니다. 이는 역사상 최초의 사이버 무기 공격으로 기록되었습니다. 2010년부터 2012년 사이, 이란 핵과학자 5명이 연쇄적으로 암살당했습니다. 가장 유명한 사건은 2020년 11월 27일, 이란 핵프로그램의 아버지로 불리는 모센 파크리자데가 테헤란 인근에서 원격 조종 기관총에 의해 살해된 사건입니다. 이란은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의 소행이라고 주장했고, 이스라엘은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2010년, 이스라엘과 미국이 공동 개발한 것으로 알려진 스턱스넷(Stuxnet) 바이러스가 이란 나탄즈 핵시설의 원심분리기 약 천 대를 파괴했습니다. 이는 역사상 최초의 사이버 무기 공격으로 기록되었습니다. 2010년부터 2012년 사이, 이란 핵과학자 5명이 연쇄적으로 암살당했습니다. 가장 유명한 사건은 2020년 11월 27일, 이란 핵프로그램의 아버지로 불리는 모센 파크리자데가 테헤란 인근에서 원격 조종 기관총에 의해 살해된 사건입니다. 이란은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의 소행이라고 주장했고, 이스라엘은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이란도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2012년 불가리아 부르가스에서 이스라엘 관광객 6명이 폭탄 테러로 사망했고, 이스라엘은 이란과 헤즈볼라의 소행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전 세계에서 이스라엘 외교관과 유대인 공동체를 겨냥한 테러 시도가 이어졌고, 그 배후로 이란 혁명수비대 쿠드스군이 지목되었습니다.
미국이 이스라엘 편을 드는 이유
많은 사람들이 미국을 이스라엘의 보호자라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더 복잡합니다. 미국이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국내 정치입니다. 미국 내 유대계 인구는 약 2퍼센트에 불과하지만, 정치, 금융, 언론, 학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이스라엘 공공정책위원회(AIPAC)는 미국에서 가장 강력한 로비 단체 중 하나로, 대선 후보들은 AIPAC의 연례 회의에서 이스라엘 지지 연설을 하는 것이 거의 의무처럼 되어 있습니다.
둘째는 지정학적 이익입니다. 이스라엘은 중동에서 미국의 가장 믿을 수 있는 동맹이며, 사실상 미국의 전초기지 역할을 합니다. 미국은 이스라엘에 매년 약 38억 달러의 군사 원조를 제공하지만, 그 돈으로 이스라엘은 미국제 무기를 구매해야 하므로 사실상 미국 방산업체에 대한 보조금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스라엘은 미국 무기의 실전 테스트장 역할을 합니다. F-35 전투기, 아이언돔 미사일 방어 체계 등이 중동 전쟁에서 검증되면 다른 나라들에 더 비싼 값에 팔 수 있습니다.
셋째는 종교적 이유입니다. 미국의 복음주의 기독교인 약 5천만 명은 이스라엘의 재건을 성서 예언의 성취로 믿으며, 이스라엘 지지를 신앙의 일부로 여깁니다. 이들은 미국 공화당의 핵심 지지층이며, 어떤 정치인도 이들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스라엘 또한 미국을 이용합니다. 이스라엘 로비는 미국 의회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미국의 중동 정책을 친이스라엘 방향으로 유도해왔습니다. 2003년 이라크 전쟁 당시, 신보수주의(네오콘) 진영의 폴 월포위츠, 리처드 펄 등 이스라엘 지지자들이 부시 행정부에서 핵심 역할을 했고, 이라크 침공을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2015년 이란 핵 합의(JCPOA) 당시에도 이스라엘의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는 미국 의회에서 직접 연설하며 합의 반대 캠페인을 벌였고, 결국 2018년 트럼프 행정부는 합의에서 탈퇴했습니다.
끝나지 않는 악순환
2020년 1월 3일, 미국은 바그다드 공항에서 드론 공격으로 이란 혁명수비대 쿠드스군 사령관 가셈 솔레이마니를 암살했습니다. 솔레이마니는 이란에서 영웅으로 추앙받던 인물이었고, 수백만 명이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습니다. 이란은 보복으로 이라크 내 미군 기지에 탄도미사일을 발사했고, 미국과 이란은 전면전 직전까지 갔습니다. 2023년 10월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 이후, 이란이 지원하는 헤즈볼라와 후티 반군도 이스라엘과 미국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후티 반군은 홍해를 지나는 상선들을 공격하며 국제 해운로를 위협했고, 미국과 영국은 예멘의 후티 거점을 공습했습니다.
이란과 미국, 그리고 이스라엘의 갈등은 단순한 국가 간 대립이 아닙니다. 그것은 1953년 쿠데타에서 시작된 신뢰의 붕괴, 석유와 핵을 둘러싼 전략적 이해관계, 시아파와 수니파의 종파 갈등, 팔레스타인 문제, 그리고 지역 패권을 둘러싼 권력 게임이 복잡하게 얽힌 결과입니다. 여기에 군수 산업의 이익, 정치인들의 국내 지지율 관리, 종교적 신념까지 더해지면서 평화로 가는 길은 점점 더 멀어지고 있습니다.
정작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경제 제재로 고통받는 이란 국민, 끝없는 전쟁 속에서 집을 잃은 팔레스타인 사람들, 전쟁 비용으로 수조 원을 쓰는 미국 납세자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100년 동안 이어진 이 갈등이 언제 끝날지, 누구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다시 시작되는 고통
2026년 2월 28일, 이스라엘과 미국이 이란 전역에 대규모 합동 공습을 개시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작전을 ‘포효하는 사자 작전(Operation Roaring Lion)’으로, 미국은 ‘장대한 분노(Mighty Fury)’로 명명했으며, 목표는 이란의 핵시설 파괴와 탄도미사일 능력 무력화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을 완전히 파괴할 것”이라며 모든 목표가 달성될 때까지 공격을 계속하겠다고 밝혔고, 미군은 B-2 스텔스 폭격기를 동원해 테헤란을 포함한 이란 전역 약 1천여 곳을 공습했으며, 오만만에서 이란 해군 함정 11척을 격침시켰습니다.
이란은 즉각 반격에 나서 텔아비브에 탄도미사일을 발사했고, 카타르·쿠웨이트·UAE·바레인 내 미군 기지를 공격했으며, 헤즈볼라와 후티 반군이 참전하면서 전쟁이 중동 전역으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현재(3월 4일 기준) 공습 5일째로 이란 측 사망자는 1,500명을 넘어섰고, 이스라엘에서도 최소 11명이 사망했습니다.
본문에 사용된 모든 이미지는 역사적 사건 및 정책을 시각화한 설명용 그래픽으로, 실제 현장 사진이 아님을 알려드립니다.






